날씨가 추웠던 지난 금요일. 그날은 도서관에서 영화와 함께 하는 인문학 강의가 있던 날이다. 영화 ‘제인 에어’와 책 ‘제인 에어’를 비교하고 시대적 상황과 작가에 대해 공부하며 왜 이런 영화가 나왔고,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수업. 1시간 넘게 인물과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공부하고, 영화를 짧게나마 보았는데 그때 강사님이 내가 빌린 시집을 보면서 강의에 잠깐 활용하겠다고 하신다. 그러고는 강의 마지막에 ‘트럭 같은 1’의 시 앞부분을 낭독한다. 언제나 마지막 얼굴은 빈 트럭 / 이것이 가끔 나였구나. (12) 우리는 늘 트럭에 뭔가를 가득 채우듯 우리 네 인생에 빈틈을 없애려고 하지만 때론 가장 잘 비우는 게 우리 네 인생이 아닐까? 한다고 말씀 하신다. 주체적인 인생을 살기 어려웠던 19세기의 여자들. 그들에게 가득 채운 트럭의 의미가 무엇이고, 빈 트럭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이 많아진다.
갑자가 뜬금없이 내가 왜 이 시집을 도서관에서 빌렸는지 그건 모르겠다. 그냥... 시집을 읽고 싶었고, 시집 읽기에 딱 좋은 날씨가 아니었을까?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시집을 읽었다. 제인 에어 수업을 끝내고 집에 와서. 트럭 같은 1의 시도 참 좋았다. 시 안에 우리 네 인생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. 하지만 그보다 더 내 마음을 움직인 시도 있었다.
뭐가 이리 붉은가
희망은 얼마나 나쁜 높이까지 올라가는지 / 희망이 잠복기를 거치는 동안 /
고통은 후회를 가르친다. / 혀의 반쪽은 늘 붉다. / 말보다 더 많은 후회를 맛보고 있다. /
맛은 어떨까 / 혀가 후회를 말하는 동안 / 이렇게 모른 척 희망은 무거워진 후회의 모서리를 돌고 있다. / 매일 후회가 쉽게 붉어진다. / 희망의 주름 속에 / 아주 작고 모난 꽃이 만발하는 후회들이 살고 있다. / 과거의 길이를 지키며 삼키거나 잘 우는 것들 / 내 후회는 뭐가 이리 붉은가 / 얼마나 더 부끄러워야 / 얼마나 더 붉어져야 / 희망이 되는가? (91)
희망고문이라는 게 있다. 결코 좋아지지 않을 것 같은 현실임에도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 한다.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면 뭔가 보일거야, 지금보다 더 최선을 다 하면 될 거야, 너는 왜 누구처럼 열심히 하지 않니?.... 이 사회의 부조리는 아무것도 고치지 않으려 하면서 모든 것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? 물론 나도 기성세대라 지금의 우리 젊은 친구들의 나약한 성정에 불만이 있을 때가 있다. 하지만 이 친구들의 삶이라는 게 너무 팍팍한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. 우리네 부모들 역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.
후회와 희망. 어찌 보면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다. 하지만 후회가 있음으로 희망이 있는 것이고, 희망이 있기에 삶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. 후회하지 않으려고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소시민들. 빈 트럭에 뭔가를 채우려는 우리는 그게 꼭 물질만이 아니길 빈다. 그 빈 트럭에 물질도 있어야겠지만 사랑과 희망 그리고 배려도 함께 하면 좋겠다.
언제나 마지막 얼굴은 빈 트럭
이것이 가끔 나였구나
문학동네시인선 071 최문자 시집 파의 목소리
최문자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파의 목소리 가 출간되었다. 앞선 시집들에서도 그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듯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 특유의 유연한 목소리와 자유자재로 뻗는 상상력의 자발성과 그럼에도 다소곳한 성품의 차분함이 읽는 내내 어떤 울컥함으로 내 안에 차고 고임을 느끼게 된다. 관록이라 부름직하지만 41년생, 우리 나이로 일흔다섯의 시인이 써나가는 시라 할 때 이토록 엄살 없이 아플 수 있을까, 이토록 긴긴 달굼 없이 뜨거울 수 있을까, 이토록 풍만하고 이토록 군살 없으며 이토록 처음 시를 쓸 때의 그 긴장의 허리뼈를 여전히 곧추세울 수 있을까.
1부
트럭 같은 1
빠따고니아
화석
재깍재깍
트럭 같은 2
꽃구경
이름
유목성
지상에 없는 잠
빨강과 노랑 사이
비탈이라는 시간
청춘
얼룩말 감정
기념사진
트럭 같은 3
어머니
눈의 지도
이상한 번역
응답
파밭
구름 애인
2부
사과처럼
사과꽃
못 박힌 여자
그 여름
가방의 고요
사과보다 더 많아
박(拍)
밀알
별과 침
흰 개 검은 개
풀의 증상
열무의 세계
아주 잠깐
욱 하고 희망이
재료들
실종
탈피
무서운 봄
자화상
은하
식목일
흐느낌
동쪽
오렌지 성만찬
3부
옥수수 모퉁이를 돌다
달콤한 은유
뭐가 이리 붉은가
나를 놓고 가요
그때부터
토마토가 몰려온다
해바라기
수요일
연인은 하루살이처럼
2013년
마지막 달래기
등
레몬 달빛
오래된 이별
희미함의 세계
얼음 장면
길 위의 대화
모호한 지구
해설|식물성 고통요(苦痛謠)의 꽃, 만개
|나민애(문학평론가)
카테고리 없음